동승촌은 황하 이북의 제남 신구 동력에너지 전환 시작구역인 태평가두 주둔지 동쪽 1공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에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다른 마을과 비교하면 6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동승촌은'젊은'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제남의 신구 동력에너지 전환 시작구역의 일원으로서 동승촌도 자신의 왕성한 활력으로 전체 시작구역의 건설 발전에 보탬이 되고 있다.
어렵게 얻은 "무에서 유로"
촌민 류재륜은 올해 이미 80세의 고령이였다. 그에게서 우리는 동승촌의 원신이 이태평공사 목축장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당시 경제조건이 전반적으로 락후하고 생활이 극히 어려웠기에 1962년에 류재륜은 부근의 마을에서 이태평공사 목축장으로 와서 정착했다."내가 처음 왔을 때 이곳은 목축장이였는데 후에 림장으로 전환되였고 후에 다시 양돈장으로 변했다."유재륜과 마찬가지로 올해 73세인 마을 주민 석흥무도 당시 생활이 어려워 다른 마을에서 이곳으로 이주했다.점점 더 많은 외촌 백성들이 다가옴에 따라 이태평공사 목축장에는 점점 많은 상주 인구가 모이기 시작했다.1964년, 당시의 현당위 서기 왕옥당은 이곳을"동승촌"으로 명명하였고 이때로부터 이태평공사 목축장은 정식으로 이름이 있는 촌락으로 되였으며 이곳에서 거주하고 로동하는 촌민들도 이 토지에 대해 더욱 강렬한 귀속감을 가지게 되였다.
유재륜이나 석흥과 달리 1973년생인 석록란은 동승마을 토박이로 자신이"이 마을에서 태어나 이 마을에 시집갔다.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올해 49세인 석록란은 중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 마을의 부인회 주임을 맡아 1991년 중국 공산당에 공식 가입했다.그녀는"동승촌은 잡성촌이다. 마을에는 10여 종의 다른 성씨가 있다. 과거 우리 마을은 경작지가 많고 집단산업이 많았기 때문에 마을 집단의 경제 상황이 다른 마을과 비교할 때 우월하다. 많은 사람들이 본 마을에서 생활이 어려워 밥벌이를 하기 위해 동승촌으로 이사했다. 이렇게 하면 우리 마을은 자연스럽게 발전하고 강대해진다"고 말했다.동승촌의 전신이 이태평공사 목축장이기 때문에 태평공사 전체의 가축이 이곳에 양식되어 마을의 집단산업이 매우 발달했다.석록란의 기억속에서 비록 과거의 경제상황은 현재와 비교해보면 천양지차이라고 할수 있지만 그가 어릴 때부터 전화, 트랙터 등 비교적 선진적인 설비가 동승촌에 나타났다."목화를 치는 기계, 기름방, 분방 우리 마을은 당시 모두 있었다."
1968년에 석흥은 입대하지 않고 군대에 갔다. 1973년에 그는 퇴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동승촌은 지난날 아수라장이 된 목축장에서 지금까지 발전하여 번영하고있다. 직접 겪은 사람으로서 석흥무는"동승이라는 곳도 정말 쉽게 얻어진것이 아니라고 할수 있다.»
지식 청년이 농촌에 내려간 진귀한 역사
석록란은 모두 동승촌 4대 지부서기의 부임을 목격했다. 초대 노서기가 재임할 때 동승촌은 아직 덕주지역에 속했다. 당시 지청이 농촌에 내려가고 있었다."만약 마을이 잘 발전하지 못한다면 기본적으로 지청을 마을에 배치하지 않았을 것이다."동승촌만 해도 1974년부터 1978년까지 5차례 하향지청을 맞아 마을의 건설과 발전을 지원했다. 석록란은"당시 우리 동승촌도 덕주지역의 붉은 깃발이었다"고 자랑했다.기록에 따르면 동승촌에 온 하향지청중 첫 53명은 뢰경화, 왕취란이 인솔하여 1974년 9월 17일에 촌에 도착했다.두 번째 28명은 류리화, 왕핑 인솔자가 1975년 8월 17일에 마을에 도착했다;세 번째 22명은 상지견, 상종나 인솔자가 1976년 8월 20일에 마을에 도착했다;제4차 18명은 장영당, 마건화 인솔자가 1977년 8월 24일에 마을에 도착했다;제5진 18명은 리복성, 장배영이 인솔하여 1978년 10월 30일에 마을에 도착했다.
지청이 농촌에 내려가는 것을 맞이하기 위해 동승촌은 새집을 지었고, 지청들은 매번 마을 사람들의 협도의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농촌에 내려간 지식청년들은 마을에 도착한후 촌민들과 함께 먹고 함께 살며 함께 로동하면서 매우 적극적으로 동승촌의 건설에 뛰여들었다. 그들은 선후로 마을의 토지정평, 재배양식 등 농업생산활동에 참여하였다.석흥무는 우리에게 지난날 동승촌 동쪽에 숲이 있었는데 마을의 인구가 적은데다가 마을이 새로 건립된지 몇년이 안되여 밤이 되면 어떤 사람이 숲에 가서 나무를 훔쳤으며 나무는 60그루도 벌채되지 못했다고 알려주었다.지청들이 온 후부터 석흥무는 그들을 이끌고 밤에 숲을 지키다가 마침내 동승촌의 나무를 지켰다."지청이 오면 외부인도 감히 우리를 괴롭히지 못한다. 더 이상 우리를 괴롭혀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류재륜은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두 지청은 자신을 따라 트랙터를 운전하는것을 배웠고 후에 제양현 부현장을 담임한 왕화는 또 일찍 동승촌에서 돼지를 먹였다.지청이 농촌에 내려간 역사에 대해 석록란 주임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1987년에 5, 6살밖에 안 된 석록란은 생산대의 지청들이 일하는 것을 자주 보러 갔다."그때 나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나를 놀려 노래를 불렀다."이 외에도 지식청년들은 마을에서 야간학교를 운영하여 이강영이 문맹퇴치교사로 있으면서 글을 모르는 촌민들에게 지식을 전수하였는데 이 행동은 동승촌 간부와 군중들의 문화생활을 풍부히 하였을뿐만아니라 촌민들의 교육수준도 제고시켰다.
석록란 주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은 지청이 농촌에 내려간 력사에 대해 비록 아주 완전한 기억은 없지만 늘 마을의 로인들이 로지청들의 당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지청이 농촌에 내려간 이 력사를 기록하려 한다. 첫째, 후손들도 이 력사를 료해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로지청들을 위해 과거의 기억을 보존할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이 자주 돌아와석록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다. 현재 해마다 로지식청년들이 동승촌을 방문하는데 그들은 종래로 자신이 분투했던 이 땅을 잊지 않았다.
동승촌의 놀라운 변천
젊은 시절 트랙터 운전사였던 유재륜은 자신의 업무 중 부상을 당한 위험한 경험을 우리에게 들려줬다.한번은 류재륜과 제자가 트랙터를 몰고 작산에서 마을로 석재를 운송하였는데 차가 황하남변의 대언에 이르러 줄을 서서 통과해야 했다. 그들이 비탈길에서 기다리고있을 때 두 사람이 운전하는 트랙터 가스브레이크가 갑자기 열렸다. 차는 대언의 비탈길을 따라 아래로 미끄러졌다. 곧 뒤의 차에 부딪치게 되였다. 류재빨리 석재빨리 석재에서 돌을 꺼내 바퀴를 비집고 트랙터의 트랙터를 움직였다.그는 두 차 사이에 끼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뒷차가 움직이자 유재륜은 바로 바닥에 누웠다. 제자와 뒷차 운전사는 재빨리 그를 황하병원으로 보냈다. 그러나 유재륜은 부상이 너무 심해 현지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었다. 그는 또 제남 제4인민병원으로 옮겨졌다."검사 후 내가 짜여 장이 부러졌다고 말했다."다행히 수술과 일련의 치료 끝에 유재륜은 완쾌돼 퇴원했다.유재륜의 회상에 따르면 과거 동승촌의 거리는 대부분 진흙길, 흙길로 마을 사람들의 이동에 큰 불편을 끼쳤다."내 남편은 올해 이미 80세가 넘었다. 어느 해 그녀는 뇌혈전이 발작했다. 당시 마을은 아직 길을 닦지 않았다. 구급차가 들어가기 어려웠다. 우리는 사람을 남쪽에서 막 닦은 아스팔트 길로 끌고 가서 구급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마을 주민 석흥무도 이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과거 마을 도로는 비 오는 날이면 울퉁불퉁하고 진창해져"도저히 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과거의 동승촌에 대해 말하면 기초건설이 락후한것은 촌민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극히 큰 난제이다. 석록란주임은 우리에게 그가 처음 사업할 때 동승촌의 중간에는 약 4메터 좌우의 좁은 길밖에 없었는데 여전히 촌민들이 스스로 건설했다."처음에 우리는 같은 사무장소도 없었다."석록란이 촌당지부 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으로 당선된후 마을에는 선후로 사무실을 짓고 작은 광장 등 기초장소를 닦았으며 또 촌민들을 위해 헬스기구를 갖추었다."부자가 되려면 먼저 길을 닦아야 한다."동승촌은 촌내의 주요도로를 건설하였을뿐만아니라 옆의 104번 국도로 직통하는 큰길도 건설하였는데 최근 10여년만에 촌내의 도로는 3차례 개축되였고 끊임없이 넓히는 동시에 경화로면의"호호통"을 실현하여 교통면에서 상당히 개선되였다.지금의 동승촌은 태평거리의 교통요로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길에서 달리는 자동차는 종래로 중단된적이 없으며 학생들이 학교에 가면 더는 먼 길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석록란을 가장 기쁘게 한 것은 최근 몇 년 동안 마을에 작은 전시관이 세워져 동승촌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각종 오래된 물건, 예를 들면 과거 마을의 초라한 농경 설비, 지청들의 옛 사진 등을 보관하는 데 전문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이 고물들은 비록"골동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동승촌의 각 시기의 발전 변화를 목격하고, 서로 다른 시대의 촌민들의 희락애고를 목격하며, 원래 본적이 이름 없는 이 작은 마을이 모든 사람이 편안하게 살면서 즐겁게 일하는 새로운 시대의 본보기촌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격한다.석록란은 또 다음단계에 마을의 광장을 좀 더 확장함과 동시에 헬스기구의 수량과 종류를 증가시켜 촌민들에게 더욱 좋은 신체를 튼튼히 하는 장소를 제공하기를 희망했다."마을에 행복원을 짓고 싶다. 이렇게 하면 나이 든 노인들도 행사장을 가질 수 있고, 적어도 일주일에 몇 끼는 와서 밥을 먹고, 행복한 노후생활을 누릴 수 있고, 진정으로 늙고 기르고 늙고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백성들이 지금의 좋은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스싱무는 그가 가장 감사하고 싶은 것은 역시 당과 국가라고 말했다."공산당의 영도와 국가 정책의 지지가 없다면 우리 마을은 절대 현재의 발전이 없을 것이다."유재륜은 "생활상 너무 편리하다. 과거에는'위층 아래층, 전등 전화'의 날도 감히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천연가스가 다 통한다"고 현재 만족감을 드러냈다.석록란은 집단산업 방면에서 더 많은 고려를 하고 있다. 복숭아나무 등 과수의 재배는 동승촌에 적지 않은 수입을 가져왔다."나는 더 이상 채취에서 글을 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현재 마을에도 작은 합작사가 설립되었다. 마을 집단을 통해 농가를 이끌고 참신한 치부의 길을 개척하기를 희망한다."
현재, 제남의 신구 동력에너지 전환 시작구역의 일원으로서, 동승촌의 모습도 종종 뉴스 보도에 나타나는데, 이 젊은 촌락은 동방에서 처음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