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은 멈추지 않고 공유혁신국을 함께 다스린다——제남 신구 동력에너지 전환 시작구 대교거리 후오촌

2022-08-19
출처:화동신문센터

후오촌은 황하 북안의 출발구 대교거리에 자리잡고있다. 2021년 4월 25일, 국무원은"제남 신구 동력에너지 전환 출발구 건설 실시방안"을 회답하여 거대한 변화를 거친후 후오촌은 일신되였다.




개혁은 멈추지 않고 개방은 멈추지 않는다

후오촌의 지부 서기 주금화는 토박이 본지방 사람이다. 그의 기억 속에서 처음에는 마을이 300명도 안 되었고, 마을 전체의 부지 면적이 작았고, 호수도 적은 편이었다. 현재 후오촌의 주민 인구 수는 이미 700명에 육박했고, 호수도 원래보다 두 배로 늘었다.

저우진화 서기로부터 우리는 과거의 후오촌이 알칼리성 토지가 비교적 많았는데, 이로 인해 식량 수확이 매우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겨울은 하얗고 여름은 그렁그렁하다"는 저우서기는 과거 마을의 경작지를 이렇게 표현했다. 겨울은 땅이 하얗고 모두 석출된 알칼리이다."무엇을 심어도 길지 않다. 여름만 되면 밭에 물이 가득하다."마을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다.66세의 촌민 왕조견은 어릴 때부터 후오촌에서 자랐다. 그는 당시 마을의 음식은 지금에 와서"개돼지도 먹지 않는다"고 형용했다. 왕조견은 당시 마을에 옥수수핵, 콩 등 잡곡으로 가공한 떡이 있었는데 후오촌 촌민들에게는 이미 흔치 않은"맛"이였음을 기억했다.1964년에 태여난 촌민 한금산도 이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의 기억속에서 지난날 후오촌의 가장 주요한 농작물은 바로 고구마였다. 생활수준이 낮고 사람들의 가장 주요한 음식은 바로 고구마말랭이였다. 그 삼키기가 어려워 한금산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들자마자 나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삼킬수 없었다. 정말 먹을수 없었다."

1984년, 신강에서 갓 돌아온 주금화는 촌민들에 의해 지부서기로 추천되였다. 척박한 토지와 고생하는 고향사람들을 마주하고 주금화는 후오촌의 진행에 대해 철두철미한 개조를 결심했다.현재의 후오촌의 식량 생산량은 연속적으로 상승하여 밀은 최초의 1묘당 150근에서 1묘당 1400~1500근으로 상승하였다.농업기계화정도도 크게 제고되였다. 촌민 왕조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60년대는 순전히 인력에 의거했다. 쟁기, 수레끌기, 맷돌, 빻기 등 힘쓰는 일은 모두 인공에 의거하여 완성할수 밖에 없었다. 청장년로력은 또 마을의 배수구, 도랑을 파야 했다."소를 빌어 밭을 갈던데로부터 집집마다 소가 있고 기계가 보급된 후오촌에 이르기까지 지금은 이미 기계화생산을 기본적으로 실현했다.저우진화 서기는 우리에게"트랙터, 콤바인, 파종기 이런 것은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고, 물길 정리 같은 것도 모두 기계가 완성한다"고 말했다.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농업외에 마을에는 또 160무의 토지를 내여 후오촌공업단지를 건설하였는데 현재 단지에는 도합 15개 좌우의 기업이 있어 전반 후오촌의 경제발전과 소득수준을 이끌었다.

촌민 한금산은 다음과 같이 감탄했다. 어릴 때 자신이 가장 바랐던 두가지 일은 첫째는 설을 쇠는것이고 둘째는 마을에서 어떤 사람이 결혼연회를 베풀었다."그때는 생활조건이 좋지 않았다. 설날과 술자리에 참가할 때만 동냥밥을 개선할수 있었다. 매번 밥을 먹으러 갈 때마다 정말 향기로웠다."그는 또 우리에게 자신이 가장 인상적인 것은 겨울에 면바지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날씨가 추운 데다 위생 조건이 좋지 않기 때문에 면바지 한 벌을 입으면 겨울 내내 입고, 마지막에는 두 바짓가랑이가 모두 반들반들하게 닳는다고 말했다.지금의 후오촌은 일찍이 이런 궁핍하고 가난한 나날을 벗어났다. 한금산은"의식걱정은 없다"는 말로 자신의 현재 생활을 형용했다."어렸을 때 설을 쇠기를 바랐는데 옷을 잘 입고 좋은 음식을 잘 먹을수 있었다. 지금은 괜찮다. 평소의 음식도 설을 쇠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 옷도 사고 싶으면 산다.과거에는 내가 결혼할 때 자전거를 탈 수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집집마다 승용차가 있다"고 말했다.

황하변에서 태여난 후오촌 촌민들은 천성적으로 황하에 대한 친절감을 갖고있었다. 한금산의 회상에 따르면 자신은 어릴 때 휴가기간에 황하를 보러 갔다.저녁 12시에 그는 동료들과 함께 마을에서 출발하여 두다리와 두발로 밤새 도보로 달렸다. 날이 밝았을 때 마침 황하기슭에 도착했다. 그때의 황하는 아직 다리가 없었다. 한금산은 5전짜리 배표를 사서 맞은편 제남성으로 가서 충분히 놀다가 집으로 돌아갔다.촌민 왕조견은 또 황하에 관한 적지 않은 신화와 전설을 들어본적이 있는데 그중"흑수만"의 이야기는 그로 하여금 지금까지 모두 마음속에 새기게 했다."흑수만도 무저만이라고 하는데 아주 깊은 큰 구덩이로서 전설에 의하면 그것은 황하에서 큰 물이 났다가 때때로 튀어나왔다."고 한다.개혁은 멈추지 않고 개방은 멈추지 않는다. 이 오래된"어머니강"은 현재 참신한 형상으로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나고있으며 전례없는 생기와 활력을 발산하고있다. 황하우에는 대교가 설치되였을뿐만아니라 황하아래에도 턴넬이 개통되였다. 대교거리에 따라 황하류역의 퇴적하도의 소통과 환경에 대한 집중정비,후오촌의 촌민들은 더는 황하의 단류나 홍수의 침범으로 자신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가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풍속을 바꾸어 공동으로 다스려 새로운 편을 열다.

1984년에 부임한 이래 지금까지 주금화는 후오촌지부 서기를 맡은 지 38년이 되었다. 이 38년 동안 주 서기를 가장 자랑스럽게 한 일 중 하나는 바로 마을의 붉은 일과 흰 일을 크게 하는 기풍을 바꾸어 마을의 정신 문명 분위기를 일신시켰다는 것이다.과거에 장례식 때 관에 부딪힌 노동자를"바부"라고 불렀는데, 저우 서기는 우리에게"예전에 만약 노인이 돌아가셨다면, 어떤 사람은 24명이 큰 짐을 짊어졌는데, 여기에는 48명이 필요했고, 또 16명이 필요했다. 32명이 필요했다. 이렇게 계산하면 장례식만 50~60명이 필요했다. 온 마을이 와서 도와줄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이렇게 방대한 대오가 밭을 지나가면 필연적으로 경작지의 작물에 일정한 압사를 초래하게 되는데 주인은 또 경작지의 손실을 배상해야 한다. 로인이 세상을 떠난 젊은이들은 마대를 걸치고 흰 가운을 입어야 한다. 이런것들은 모두 상당히 많은 물력과 재력을 소모하였는데 원래 부유하지 못한 후오촌 촌민들에게는 거대한 지출이라고 할수 있다.주금화는 부임한후 신속히 풍속을 바꾸는 사업을 시작했다. 먼저 장례방식을 토장에서 화장으로 고쳤으며 촌민들이 흰 가운 등 전통복장을 입는것을 더는 허용하지 않고 더욱 간결한 완장으로 대체했으며 음식면에서도 모든것을 간소화했다.풍속을 바꾸는 사업의 전개는 농촌지역의 봉건미신사상에 대한 타파강도를 높여 촌민들로 하여금 더욱 적합한 방식으로 자신의 효도와 애도를 표현하게 하였고 그들의 생활부담도 크게 경감시켰다.

새로운 시대의 현대화 바람은 후오촌의 구석구석에 불었고, 마을 사람들의 생활의 모든 차원에도 불었다.촌민 왕조견은 60년대 후반에야 오촌에 영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기억했다."5, 6살 때 나는 처음으로 영화를 보았다."스크린속의 기차가 머리위로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권총속의 총알이 자신을 향해 날아갔다. 어린 왕조견은 심지어 놀라 울기도 했다. 평소의 오락활동이 비교적 결핍하여"그때는 마을에서 영화만 틀면 온 마을 노소가 모여 보았고, 설이 다가오면 연극을 하는 사람이 와서 공연했는데, 우리도 매일 보러 갔다."1975년, 소집에 응하여 입대한 왕조견은 마침내 부대에서 처음으로 텔레비죤을 보았다.현재의 후오촌은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컴퓨터, 스마트폰 등 현대화 설비의 보급 정도도 상당히 높기 때문에 왕자오는"오락 활동은 과거와 정말 다르다"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후오촌의 촌간부로서 주금화는"민주는 우리 지부의 일관된 작풍"이라고 말했다.후오촌은 주제당의 날 등 일련의 행사를 개최하여 촌중의 각 사무의 결정권을 당원과 군중대표에게 넘겨 공동으로 토론하게 함으로써 결책의 민주성과 과학성을 확실하게 제고시켰다."우리 지부는 절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큰일과 작은 일은 모두 군중과 상의해야 한다."주금화는 확고하게 말했다.2020년, 후오촌 당지부는 5성급 촌당조직으로 선정되여 기층당건설의 격자화로 촌급관리의 정밀화를 추진하여 진정으로"수요발견은 격자에 있고 자원은 격자에 통합되며 문제해결은 격자에 있으며 대중만족은 격자에 있다."는 것을 실현하였다.

당지부와 촌민위원회의 공동한 노력하에 후오촌은 민생개선을 중점사업내용으로 삼고 기초 및 문체시설건설을 강화하고 신형의 농촌의료협력과 양로보험제도를 추진하며 록화수준을 제고하여 아름다운 농촌을 건설하는 등 면에서 모두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특히 전염병예방통제기간에 당원들이 솔선적으로 의무당직을 서고 군중들이 적극 호응하여 후오촌군방군통제의 엄밀한 방어선을 튼튼히 구축했다.군책군력, 공동관리공유는 후오촌이 시종 견지하는 촌관리리념으로서 금후의 후오촌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군중을 제반 사업의 첫자리에 놓고 발전성과가 모든 촌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노력할것이다.

점유율